[White Fall] Endless Whiteness

2022. 11. 25. 22:51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교토 북부. 마이즈루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작은 어촌 마을. 얼어붙은 강물에 드리워진 눈 쌓인 목재 가교는 이름 모를 사찰 입구로 이어지고, 그 위를 두 사람이 지난다. 푸른 새벽 깨끗한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4분 정도. 4분. 240초. 고작해야 음악 한 곡. 그사이에 마음을 정하자, 라고 이쥬인 아키라는 생각한다.
그의 검은 코트 오른쪽 주머니엔 작은 오르골이 들었고, 반대쪽에는 낡았지만 잘 손질된 리볼버 한 정.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대신 함께 걷는 상대의 왼팔을 붙잡고 있다. 서로 보폭이 맞지 않아, 다리 위 흩어지는 구두 밑창의 모양은 불규칙하게 녹아내린다. 눈이 내리는 무음. 입김이 퍼질 때의 숨소리, 상대의, 시로이 키쿠의 오른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선물용 과자의 공단 리본과 포장 종이가 사각거리며 얽히는 소리. 먼 곳에서 얇은 얼음이 깨져 물이 흐르는 소리. 눈을 가득 머금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외엔 어떤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고, 시야에 담긴 경관은 온통 백색이었다.  

신년 전 하츠모데(初詣)를 맞이한 이유는, 새해가 밝으면 더는 서로를 마주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기반했다. 자신의 마음조차 좀처럼 완만히 갈무리할 수 없는 그들이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곳에 원하는 게 있지 않을까 예상하며 함께 보내온 시간. 공들여 꾸민 무대와 즉흥극. 연기하고 있음을 잊고 연기 자체가 된 배우. 그들은 직감했다. 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는 기차를 타면, 우리는 지긋지긋한 이중사고에서 벗어난다. 누군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읊기만 한다면, 우리는 관객석에서 엔딩 크레딧 화면의 옅은 조명을 받은 서로를 마주하게 되겠지. 그저 우연히 같은 영화관 상영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정도의 의미마저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사라져버리는.
그러나 대본에 없는 대사란 문자 그대로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말이기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유치하게도 패배의 선언으로 기억을 끝맺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리를 절반 지났다. 두 사람은 아담한 집들 앞 늘어진 각양각색의 배, 멀리 지평선을 채운 상록수의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잠깐 멈춰 섰다. 이른 시간이라 다른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물을 머금은 무거운 공기가 가슴 속으로 잔뜩 파고들었다.
「와.」 무심코 감탄사를 뱉고, 「지금 사는 곳 창밖에서 이런 경치가 보이면 좋겠어요.」 아키라가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키쿠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가만히 빛났다.
「이사 오는 건?」 희미한 고층운 너머에 시선을 둔 채, 키쿠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늘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 그건 말이지…진짜 이동하고 싶다기보다 뭔가 색다른 일이 있었으면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무언가.」
「과연.」   
자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찾아오길 바라며, 키쿠는 난간을 붙잡았다. 새로운 일을 겪길 바라는 아키라. 짧은 다리 중간에서 멈춰 서 풍경 이야기를 할 만큼 자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아키라. 그러나 사고의 한구석에서는 불가능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상대는 무엇에도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목적이 없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습성이 있고,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자신과 함께 춤추자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이고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교묘한 도박인 것처럼 키쿠를 무대 위로 이끌지만 일단 올라선 순간이 아니라 이름을 불린 순간부터 나의 자유를 빼앗아버리는 사람이다. 긴 사냥놀이는 끝맺고 그는 이제 그물에서 나가야 한다.
여행지로 이곳을 택한 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신주쿠의 백화점이 나았을지도. 창이 없는 거대하고 복잡한 건물 속에서 정신없이 쇼핑하다 12층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와인에 취하여, 적당한 분위기 속에서 애매하게 작별하는. 
이곳은 너무 적막하고 단순해. 생각이나 말이 곧바로 전해지고 만다. 

아키라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트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난간 위에 올렸다. 무거운 유리 몸체의 오르골. 태엽을 돌리는 중에는 쇠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이내 나지막한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음악인데……키쿠는 기억 저편을 더듬어보았으나 스치는 잔상이란 성탄절 밤 도시의 불빛, 히터 탓에 텁텁해진 공기, 어느 날의 만찬, 식물성 생크림의 싸구려 단맛 같은 단편적 감상뿐이었다. 지금 필요한 전환은 멋진 경관도 낯익은 음악도 아닌 단 한마디의 말. 족쇄를 끊는 말이라고 판단하면서도, 상대의 쓸쓸해 보이는 옆얼굴을 바라보자 좀처럼 입을 떼기 어려워졌다. 지갑에 마술용 코인이 남아 있었던가? 앞면과 뒷면 중 하나를 예측하는 게임이라도 제시해야만 할까? 
「그런데, 이걸로 몇 번째지?」
미간에 한 줄 금이 가는 줄도 모르는 채 몰두하던, 그는 돌연 튀어나온 아키라의 말에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뭐?」
「아뇨. 혼잣말이에요.」
선율은 계속 흐른다. 아키라는 자신의 손바닥 위로 오르골을 옮기고, 마치 자랑하듯 살짝 들어 올린 채 키쿠를 데리고 다리 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스텝을 밟을 때쯤 완벽한 타이밍에 음악이 끝나고, 신사 토리이 앞에 도착했다. 

「또 망설였어.」
「…아키라.」 
「제가 졌어요.」
「…정말로?」 아키라에게는 처음 보이는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상대는 답변 대신 총구를 겨눴다. 방아쇠를 당긴다. 패배자의 쓴 미소와 함께,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12월 24일.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목전. 교토 북부. 작은 어촌 마을 거리의 불빛. 얼어붙은 강물에 드리워진 눈 쌓인 목재 가교. 맞잡은 손의 온기. 멀리 보이는 토리이. 두 사람은 걷고 있다. 남은 시간은 고작 4분, 기껏해야 음악 한 곡. 이 순간은 완벽하며 영원하다. 
다시 마음을 정해야 했다. 상대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진동하고 있다. 정말로? 그런데 이걸로 정말 몇 번째지? 백 번을 넘을 때부터 세는 걸 그만두었다.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작은 마법을 이런 곳에나 사용하다니. 더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 나를 보면 비웃을지도 몰라. 하지만 원대한 꿈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것따위 평생 가져본 적이 없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 했다. 꾹 참은 채 무감하게, 키쿠를 힐끗 바라본다. 주머니 속에─그리고 마음속에 품은 것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장치. 혹은 순간으로 영원을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장치. 자신이 패배를 인정했을 때 그가 지은 낯이란. 나는 이 행복 속에서 영영 멈춰버릴 수도 있고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불행 속에 밀어 넣을 수도 있다.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속박당했을 때 비로소, 삶의 주도권을 완벽히 가졌다고 느낀다. 나는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말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울 수도 있고 웃어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실패와 성공은 더는 서로의 뒷면조차 아닌, 매끄럽게 이어진 클라인 병의 모양과 같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결론 내리자면 자신은, 진정한 의미로 사랑하기 위해 이 마법을 손에 넣은 것이라고. 책에 적혔다면 곧게 밑줄을 쳤을 이 문장에는 그가 여태 얽매이던 이름이나 출신, 텅 빈 욕구, 자기파괴로밖에 이어질 수 없는 애정결핍에 아름다운 결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중간에서 멈춰 섰다.
「키쿠, 잠깐만 눈 감아 봐요.」
「좀 무서운데.」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요.」

보채는 듯이 바라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아키라는 그가 실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 물러났다. 다음 순간, 얼음 호수의 균열 속으로 무언가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키쿠는 짧은 파열음이 잦아들 때까지, 자신의 암흑 속에서 아키라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눈을 그리면 입이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입술을 그리면 눈을 뜨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갇힌 빛무리의 잔상만이 맴돌며 뇌리를 쿡쿡 찔러댔다.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아, 이제 눈 떠도 괜찮아요.」
「말씀하시죠.」
「이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만, 상냥하게 대해줄래요?」

두 사람 다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곧 손을 맞잡고 건너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마침내 그들이 끝에 도착했을 때, 아키라는 품에 남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