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rden of Promise] 긴 겨울을 지나고

2022. 11. 25. 22:51

1.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겨울은 의외로 바람이 차지 않았다. 슈피엘베의 날씨가 차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엑소시스트가 임무를 완수했기에 기쁜 마음에 이노센스가 날씨 조절이라도 하는지. 평상시라면 칼과 같이 날카롭게 벼려진 바람이 불었을, 지금은 따뜻한 눈을 가진 바람이 부는 생존불가구역 - 아니, 이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땅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제 계절을 모르는 마냥 차가운 땅을 뚫고 오랜 인내 끝에 핀 여린 새싹 위로.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면 여린 새싹은 단번에 져버렸을테지.
구름이 내리는 하늘은 어두운데도 마냥 밝았다. 르웰린조차 세다가 포기한 몇십번째일지 모를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상하게도 르웰린이 하늘을 올려다볼때마다 눈이 오는 것 치고는 맑은 날씨를 뽐냈다. 하지만 정작 르웰린의 속마음은 어둡다. 어두운게 당연했다. 제 마음에 자리를 틀고 앉은 짙게 가라앉은 녹음을 지키지 못할때면, 더한 어둠이 그 자리를 점령하고 똬리를 틀었다.

그자리에 바라던 희망은 없었으니.
르웰린은 아득바득 버텼다. 아득바득, 집착. 집착보다 더 깊은 무언가.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서 새겨진 녹음의 온기는 르웰린을 진창 아래로 가라앉지 못하게 한다. 하지 못하게 했다. 짙은 녹음,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소리. 그때마다 마음은 언제나 하나였다.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네가 잊은 웃음을 되돌려주겠다고.

수십번의 루프 끝에 희망은 있다고 하던가. 그간 돌아가던 시간은 너무 어둡고 너무나 길었으니. 제가 부족함을 여실히 깨닫는 시간이라. 솔직히 르웰린은 지금도, 펠레야 윈터를 진창에서 손을 내밀어 붙잡고 끌어올린, 마침내 같은 시간을 걷게 된 지금도 짙은 불안감을 느꼈다. 꿈일지도 모른다. 악마의 농락일지도 모른다. 펠레야 윈터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건 너의 단순한 집착일 뿐이라고.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네 것이 아니라고. 절망해서 무너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끝은 계속될 것이고, 너는 끝없는 루프에 휩쓸릴뿐이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저주와 같았다. 살리고 싶어?

지금도 창백한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르웰린은 해냈음에도. 그는 해냈음에도. 가족을 구했고, 이 세상의 절반을 잡아먹던 악마까지 치우는데 성공했음에도. 사랑하는 이를 구하고, 사랑하는 이와 맺어지는데 성공했어도 어둠은 질척하게 그 밑에 달라붙어 있었다. 지독한 병이다. 너를 잃은 병이다. 펠레야 윈터를 잃은 순간부터 시작된 병이다.

"--에린."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그런 진득한 어둠에 다시 한번 빠지려는 찰나, 그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낮고 다정한 목소리다. 저를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가 르웰린이 끌어올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르웰린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해서 시야를 돌리면, 뒤쪽에서 찬란한 녹음이 만개한다. 찬란한 녹음이, 그가 제일 사랑하는 녹빛 존재가 눈을 막기 위해 우산을 쓰고 그에게로 밀려들어오고-

"페리."
"...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요?"

눈이 오는데, 그렇게 얇게 입고. 다정함이 꽃잎처럼 내려앉은 목소리. 차분하게 빛나는 녹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자신이 담겨있다. 자신보다 조금 낮은 시야에서 자신을 눈에 담는 녹음을 보는 순간 르웰린은 완전히 현실로 돌아왔다. 어둠이 걷힌다.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던 어둠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마음에 온전히 자리를 새긴 연인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입가에는 단연, 밝은 웃음이 떠오른다. 제가 늘 짓던 웃음이다. 말갛게 웃는 웃음. 연인의 웃음을 담아 조금은 침착해진. 한발자국, 두발자국.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고 그리운 이가 다가온다. 소중한 이가 다가온다. 은은하고 투명한 햇살 아래, 부드러운 속눈썹 밑에서 짙은 숲이 깜빡인다.

"이것 봐, 페리. 이렇게-- 새 싹이 돋고 있어."
"그렇네요. 이제 이곳도 사람들이 돌아올수 있을테죠. ...근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건가요. 에린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이브 축제가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는데."
"응, 이제 돌아가야지. 페리가 마레씨의 가게에 들리는 것을 막으려면."
"그러니까 이제 안취한다니까요..."
 
이제 더이상 어둠에 빠질 일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낸 이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련을 버린다. 더이상 필요 없는 것이다. 끝없이 달린 끝에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는 주인이 더이상 자신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눈치챈 오르골이 땅으로 떨어진다. 눈 위에 부드럽게 떨어진 것은 소리조차 없었고,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슈피엘베로 돌아가는 이들이 이제는 필요없는 오르골의 존재를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2.

밤은 젊었고, 시간은 많았다. 이제는 완전히 저문 하늘 밑으로 눈송이들이 끝없이 내렸고, 가는 곳마다 흥겨운 캐럴이 몇시간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반겼다. 어딜 봐도 당장 집으로 들어가기는 아깝기 그지 없어서. 이제 악마를 퇴치하는 임무가 사라진 엑소시스트들은 시간이 많았다. 아니, 이제 시간이 많아진거지.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도시는 좀처럼 땅과 하늘의 경계선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르웰린도, 펠레야도 이제는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마음껏 즐겼다. 오래된 뒷골목, 펠레야에게 있어서 단골이지만 르웰린에게 있어서 위험했던 쇼콜라 봉봉 사건으로 인해 자주 오지 않은 카페 앞의 오래된 도보도 마찬가지라.

"나름 페리를 닮게 만든다고 시도했는데 말야."
"...나름 절 닮은 것 같은데요?"
"아냐, 하나도 안 닮았어. 우리 페리는 이보다 훨씬 예쁘고, 사랑스럽고, 멋지다고--."
"...그러니까 주변에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런 말은 부끄러운데-"
"아, 들으라고 하지 뭘? 사실대로 말하는 것 뿐인데-"

크리스마스 이브는, 자고로 늦게 들어가는 밤이라. 물론 르웰린의 일방적인 우격다짐이었다. 페리윙클 마레의 가게를 지나면 금방 나오는 르웰린과 페리, 둘만의 집으로 가는 길엔 눈이 한가득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눈이 쌓이기 전에 르웰린과 페리가 사이좋게 장식해둔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린 나무 근처 땅은 누구도 밟지 않은 부드러운 눈이 사박사박 쌓여 있었다. 밞을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귀여운 소리가 났다.

"눈 사람은 좀 닮았는데."
"...오리도 나름 괜찮게 나왔어요."

두 엑소시스트를 악마가 나타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그들이 방금 만든 눈오리와 눈사람이었다. 귀여운 눈오리 한쌍, 큼직한 눈사람이 한쌍. 전부 르웰린과 페리가 만든 것이다. 아니, 거짓말이다. 전부 르웰린이 만들었다. 페리는 구경만 하고 있어-- 내가 완전히 멋지게 만들테니까! ...진짜로요? 그렇게 해서 연인의 미심쩍음이 담긴 응원을 받고 만든 첫 눈사람과 눈오리는 장렬하게 실패했다.

어릴땐 나름 잘 만들었는데...
기억 따라 만드는 것도 꽤 어렵네요.

그렇게 펠레야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만든 눈사람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조금 더 큰 눈사람에는 펠레야가 연노랑 목도리를 야무지게 둘러주었고, 르웰린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녹빛 목도리를 풀었다. 각자의 색이 들어간 목도리를 두르니 두 눈사람은 아주 눈에 차진 않아도 나름 르웰린 같았고 펠레야 같았다. 하지만 눈오리는 아니었다. 요즘 sns를 자주 보는 젊은이들이 아니었던 둘 입장에선 눈오리 장난감을 가지고 있을리 만무했고, 손으로 만드니 단연 어설펐다.

"나중에... 장난감을 사서 제대로 해봐야겠어."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이건 페리 눈 오리가 아니니까! 앞으로 이틀은 눈이 더 온댔잖아? 더 만들어야지--"
"하아... 알았어요. 사지 말라고 안할게요.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갈까요. 이렇게 있다가 시간 다 가겠어요."

연인들의 손이 쥐어진다. 눈오리에 집중하고 있던 르웰린의 집중력이 단번에 제법 차가운 펠레야의 손에 쏠린다. 평상시보다 더 차갑다. 그건 자신도 그닥 다르지 않았지만. 눈 오리를 만들어 보겠답시고 맨 손으로 열심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눈을 만진 탓이다. 그래도 르웰린이 체온이 좀 더 높은만큼 조금 더 따뜻했다. 르웰린의 오른손을 잡은 펠레야의 오른손 위로, 르웰린의 왼손이 오른손을 덮는다.

"가서 맛있는거 잔뜩 해줘야지."
"알았어요. ...대신 좀 쉬고, 몸도 녹인다음에 해줘요. 알았죠?"
"알았어-- 당연하지. 페리와 한 약속인걸. 난 페리와의 약속은 꼭 지켜."

연인들은 서로 잡고 있는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서로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손을 맴돌고, 차가운 눈을 만지고 있던 손을 따뜻하게 녹인다. 연인은 사이좋게 서로를 맞잡은 채로, 발걸음을 그들의 안식처로 옮겼다.

그 어디에도 텅빈 마음은 없으니. 몸을 웅크릴 일도 없어지니. 큰 바람이 불었고, 얼음장 같이 싸늘했던 긴 어둠이 그 끝을 맺는다. 남자는 길게 바랐던 희망을 손에 쥐었다. 짦은 온기는 이제 스치고 떠나는 것이 아닌 바로 옆에 있었다. 아무도 혼자 남지 않았다. 둘은 이제 영원히 같이 있을테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흐린 하늘은 없을테니.

뎅-

멀리 첨탑에서 종이 울렸다. 열두시를 알리는 경쾌한 음. 그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크리스마스 이브가 끝나고 크리스마스가 왔다는 의미였다. 르웰린에게 있어 하나뿐인 연인을 찾으러가는 루프를 시작하는 알림이었다. 하지만 루프는 시작되지 않았고, 시간은 끝없이 이어졌다. 옆의 연인이 사라지는 일도, 세상이 멈추는 일도 없었다. 온기는 손 안에 있었다.

그걸로 족했다.
르웰린과 펠레야는, 이 시간에 같이 살아 있었다.
"크리스마스네-."
"...응. 그렇네요.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에린."
"메리 크리스마스-, 페리."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전부 온전했다.
떨어지는 눈이 살며시, 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