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4] Happy Xmas But War is Not Over Yet&거룩한 전장

2022. 11. 25. 22:51

1. Happy Xmas But War is Not Over 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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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들 중에 시간여행자가 있어!"

  부실에 있는 모두가 돌아보았다. 이 중에서 이 당돌한 하급생에게 냉정하게 츳코미를 넣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럴 리가 있겠냐. 이만 귀가해도 되겠어?' 라고 내가 말하기 직전에,

  "…라는 설정으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하고자 합니다."

  엣헴! 헛기침을 하며 슌도가 선언했다.

  슌도 에이리. 1학년 C반. 쪽빛이 도는 검은 단발머리에, 고양이처럼 뾰족 올라간 회색 눈이 인상적인 <미스테리부 부장>. 고등학교 1학년씩이나 됐지만 키도 작고 뼈대도 가늘어서 1년 차이인 내가 봐도 소년인지 소녀인지 애매한 어린애 느낌이랄까. 문화제에서 고양이 귀에 메이드복을 입고 있으면 여자애들이 꺅꺅 웃으며 "슌도 군 정말 여자애 같아(웃음)"하고 놀리는 타입의 인간상이다.

  그런 슌도가 설립한 부가 바로 <미스테리부>. 뻔한 이름에 걸맞게 뻔한 활동을 하는 우리 부에는 부원이 네 명밖에 없다. 이 중에 시간여행자가 있다는 설정으로, 또 뭘 하자고 하는 건가.

  "그, 그럼 뭘 하면 되는 걸까, 슌도 군…"

  그래, 잘 물어봤다. 내가 먼저 묻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준—좀 더듬었지만—사람은 3학년 C반, 사가 무라사키. 이름이 정말 황당한데, <겐지모노가타리>의 무라사키노 우에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여자다. 일본 최고最古의 히로인에서 이름을 따왔으니 꽤나 미소녀겠지? 싶겠지만, 주황색의 천연 곱슬을 아무렇게나 하나로 묶은 안경잡이에 구제할 여지 없는 멸치다. 자세도 구부정하고 완전히 히키코모리 오타쿠 비주얼. 그녀를 데려온 슌도 가라사대, "미스테리부라면 자고로 미스테리랑 오컬트 지식에 빠삭한 문학 오타쿠 캐릭터가 있어야지!"라고 한다. 그거 사가 선배 앞에서 직접 말한 건 아니겠지?

  "후후, 나도 궁금해. 에이 군은 늘 재미있는 이벤트를 생각해 주니까…♡"

  그리고 이쪽은 토우지 미키. 3학년 B반. 녹색이 도는 검은색의 긴 생머리를 히메컷으로 자른 진짜배기 미소녀다. 흰 피부에 늘 부드러운 향기가 나는 슬렌더 미인인데, 제일 중요한 건 가슴이 (이 단어는 미스테리부에 의해 검열되었습니다)컵은 될 것 같다. 성격도 상냥, 요리도 완벽, 여자력 발군. 이런 미인이 왜 이런 찐따 부에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 무엇을 숨기겠냐마는 나도 아싸다. 키가 좀 크다는 이유로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잠깐, 드리블 연습 중에 공을 밟고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발 인대가 나가버렸다. 안 좋은 의미로 개성 없는 얼굴과 시원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중상위권은 갔었던 내 스쿨 카스트는 덕분에 그야말로 수직하락. 귀가부들 중에서도 아슬아슬 폐부 직전이었던 미스테리부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꽂아넣어져, 성별불상 4차원 단발과 안경잡이 오타쿠, 히메컷 거유 미소녀와 함께 꽃다운 2학년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 집중 집중!"

  이런,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들켰나. 슌도가 내 쪽으로 경고의 눈빛을 보내더니, 손가락 마디를 세워 툭툭 등뒤의 화이트보드를 두드렸다. 이윽고 체셔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주욱 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는 말했다.

  "그럼 들어봐! 첫 번째 규칙, 시간여행자는 미래에 벌어지는 일을 말하면 안 된다!"

 

2

  크리스마스까지 2주일. 우리는 슌도가 정한 규칙에 따라 우리 중에 숨어있는 <시간여행자>를 찾아야 한다.

  규칙 첫 번째, 시간여행자는 미래에 벌어지는 일을 말하면 안 된다.

  규칙 두 번째, 시간여행자는 스스로 시간여행자임을 밝힐 수 없다.

  규칙 세 번째,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시간여행자를 찾아낸 사람이 선물을 받는다.

  아무도 정답을 맞추지 못하면 시간여행자가 선물을 받는다.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선물이야, 기대해도 좋아!"…란다. 하긴 슌도네 집은 제법 잘 산다지. 중화요리점은 요리점인데, 라멘이나 게살볶음밥을 파는 동네 중국집이 아니라 고급 요정이라고 했다. 솔직히 미스테리가 다 뭔가 싶지만,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걸 위해서라면 노력해봐도 손해는 아닐 것이다. 그래, 까짓거 분발해서 임해보자.

  …라고 생각했는데, 난 지금 왜 슌도와 쇼핑몰에 와있는 거지?

  "그럼 크리스마스를 시간여행자 찾기 하나만 하고 끝낼 생각이야? 모가밍은 하여간 상상력이 없어! 재미없고 지루해! 최저!"

  슌도가 쇼핑카트를 발로 밀며 꺄하하하, 높게 웃었다. 저 자식, 모가밍은 뭐가 모가밍이야. 내가 엄연히 한 학년 윈데 제대로 선배 취급을 해준 기억이 없어. 쇼핑 카트를 마치 놀이공원 범퍼카마냥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녀석은 붉은색과 녹색 흰색이 가득한 파티 굿즈 진열대 사이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부실을 멋지게 꾸며야 돼! 파티를 할 거니까. 일단 트리용 장식을 많이 사자. 산타 모자랑 순록 머리띠도. 트리 장식은 미니 선물이랑 미니 인형이랑 미니 양말이랑 미니카랑 공모양 장식이랑 꼬마전구랑..."

  "꼬마전구는 있잖아. 문화제 때 쓰던 거."

  "똑같은 걸 또 써?! 재미 없어!"

  우~! 소리를 내며 슌도가 손에 잡히는 파티 굿즈 상자를 카트 바구니에 던졌다. 그 사이에 온갖 잡동사니 같은 굿즈가 잔뜩 쌓여서, 빨간색 리본이 달린 상자는 찌그러지지도 안에 있는 게 망가지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무료하게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뭘 멍하니 있는 거냐, 모가미? 지금 슌도랑 둘이 있잖아! 시간여행자 찾기의 힌트를 얻어내야지!'

  크흠 크흠. 평정심을 가장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어이, 슌도. 시간여행자 말인데, 아무튼 너는 아닌 거지? 게임 메이커니까."

  체셔 고양이 이빨이 이 쪽을 쳐다봤다. 이히히, 하고 글로 쓴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슌도가 대답했다.

  "모가밍은 역시 바보야. 없는 규칙을 만들어내고 있잖아!"  



3

  그리하여 작전 두 번째. 사가 선배를 붙잡고 물어보기. 뭐 작전이랄 것도 없는 무식한 방법이다만, 나는 정공법밖에 모른단 말이다. 뭣보다 사가 선배는 아는 게 많고 사람을 놀리지도 않으니까, 슌도 자식보단 수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방과후의 사가 선배를 찾는 건 언제나 쉬웠다. 그녀는 보통 미스테리부 부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아니면 백 퍼센트 도서실이었다. 슌도 녀석은 부장 주제에 다른 부에 놀러가거나 장난 계획을 실행하느라 밖에 나가 있는 일도 많았고 토우지 선배는 신출귀몰했지만, 사가 선배는 타의로 입부당한 부의 아지트를 누구보다도 오래 지켰다. 자유의지라는 게 없는 거 아닌가 싶다.

  오늘의 그녀는 도서실 쪽이었다.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던 공간이지만, 다리에 깁스를 말고 있는 동안에는 만화책을 읽느라 제법 출입해서 서가의 순서 정도는 외우고 있다.

  "사가 선배. 지금 바빠요?"

  누가 문학 오타쿠 전형으로 잡혀온 사람 아니랄까봐, 선배는 800번 서가에서 문고본을 손에 들고 보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알이 이쪽을 보며 햇빛을 반사했다.

  "아니, 따, 딱히. 보다시피…"

  "늘 책 보고 있네요. 오늘은 어떤…"

  아이스브레이킹, 스몰토킹, 뭐 그런거. 시도해 보려고 사가 선배가 보던 책 표지를 들여다봤지만,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 그야 <라쇼몽>이다. <달려라 메로스>나 <주문이 많은 요리점>같은 거잖냐. 초,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워서 의무교육을 마친 일본인이라면 다 아는, 고전 읽는다고 폼 잡을 수도 없는 거. 그런 걸 도서관 고인물인 사가 선배가?

  "…재미있어요, 그게?"

  "나, 나름. 아마도…성운상 노미네이트고…"

  "성운상?"

  잘 보니 선배가 들고 있는 책에는 띠지가 둘러져 있었고, 대문짝만하게 <성운상 노미네이트!>라고 써있었다. 성운상이 뭔데. 라쇼몽 같은 고전소설도 상 탈 뻔했다고 광고하고 그러나? 조금 더 띠지를 자세히 보니, <대형 SF 신인 등장>…이라고 좀더 작은 글씨로 써 있었다.

  "SF?"

  "응, 조, 좋아해. 아득하게 먼 미래…이야기. 인데, 사람의 모습은 바뀌지 않아서."

  띠지의 글자를 따라 읽었을 뿐인데, 내가 SF에 대해 뭘 알고 말한 줄 알았는지 선배의 텐션이 조금 올라갔다. 늘 종잇장이나 시멘트처럼 혈색이 없는 콧등이 발갛게 물들어 산타를 태우는 순록 같다. 슌도가 쇼핑 카트에 던져넣은 순록 머리띠가 잘 어울리겠다 싶었으나, 그런 것보다는 SF. 내가 비록 SF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시간여행이 SF의 단골 소재라는 것 정도의 상식은 있다. 하항, 사가 선배. 게임에 관심 없는 척하더니 자료조사 중이었구만?

 우주 사진으로 된 북커버를 툭 치며 뻔뻔하게 물었다. "시간여행자는 어떻게 찾는지 알아요?"

  "시간…여행자?"

  "까먹은 거 아니죠? 슌도가…부장이, 상품 걸었잖아요. 크리스마스 이브 날까지 누가 시간여행자인지 맞추는 거요."

  "아아…"

  사가 선배가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응"인지 "기억 안 나"인지 애매했지만, 전자일 거라고 멋대로 가정하고 혼자 질문을 덧붙였다.

  "힌트 좀 주면 안 돼요? 부장이 말해준 규칙만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요."

  "그럼 규, 규칙을 만들어야지."  

  "에?"

  뜻밖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깜빡여졌다. 그거 슌도가 한 말이랑 정반대 아니야?

  "부장은 없는 규칙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요."

  "그럼 법, 법칙이라고 하는 게 좋을까. 에, SF도 이야기야, 모가미 군.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법칙이 있어…"

  사가 선배의 말은 영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되물어봐도 더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고전 소설에서 제목을 딴 신인 작가의 SF소설이 어지간히 재미있는 모양이지. 그렇다고 능동적으로 쫓아내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나는 잠시 선배 주변을 알짱거리며 이름도 모르는 SF 소설들을 꺼내 보는 체 하다가, 결국 도서실을 떠났다.



4

  근성 없는 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만, 사가 선배에 대한 탐색전을 허탕친 후 플레이스테이션(가정)에 대한 내 열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져 버렸다. 심지어 2학년 기말고사 시험지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해서, 1주일 정도는 시간여행자 게임이라곤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완~전한 백지. null 그 자체.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하교길에 뜬금없는 인물과 마주친 것은.

  "모가미 군?"

  "…토우지 선배?"

  히메컷 거유 미소녀 토우지 미키의 등장이었다. 이 별볼일 없는 소도시 상점가에. 하늘은 뿌옇게 흐렸고 아케이드의 강화유리 천장은 그보다 더 더러웠지만, 교복 코트 위에 머플러를 둘러 감은 토우지 선배가 요염한 눈웃음을 짓자 그 희뿌연 색도 감성적인 필터로 느껴졌다.

  "어디 놀러 가는 길? 우연이네."

  "아, 아니에요. 그냥 하교하는 길이 늘 이쪽…선배는요?"

  "으음, 사전조사라고나 할까."

  "사전조사요? 뭘 조사하는데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바를 좀."    

  그러면서 코트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엄지손가락으로 등뒤를 가리켰다.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상점가 제과점의 쇼윈도 케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설탕 껍질이 바삭한 메론빵, 초코칩과 건포도가 박힌 뺑오래쟁, 그 사이에 벌써부터 하얀 크림과 겨울 딸기를 얹고 놓여진─

  "케이크 판매요? 그거 빡세겠네요."

  "후후, 그치? 하지만 시급이 센걸. 연말이라 지갑이 아슬아슬하단 말이지...♡"

  그러면서 배시시 웃었다. 말도 안되게 귀엽다. 기분 탓일까, 어째 머리 주변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라고 머리를 두어 번 휘휘 저으면서 필사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만 해.

  "그럼 가볼게요. 학교에서 봐요."

  라고 말하면서 휙 돌아서는데, 뭔가 이상하다. 잠깐잠깐? 이 여자, 왜 보폭을 맞춰서 따라오고 있는 거야?

  "모가미 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왜 도망치는 거야?"

  "도, 도망치는 게 아니라...(맞습니다만!)...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요."

  "어머, 난 또." 자주빛 눈을 동그랗게 떠 묘하게 토끼 같아진 표정.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줄 알았어."

  “아뇨, 딱히.” 웃기게도 나는 이 때, 토우지 선배의 말을 듣고도 무슨 의미인지 전혀 유추하지 못했다. 그저, 어느쪽인가 하면 날카로운 인상의 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 또 소박한 느낌이 되어서 방심할 수가 없다─그런 생각에 정신이 없었을 뿐이다. "그냥 지나가다 인사했을 뿐이에요."

  그러자 선배는 모양 좋은 입술을 끌어올려 웃더니, 빵 가게 쪽으로 한 발짝 되돌아갔다. 살랑, 긴 머리를 우아하게 날리며 돌아보는 그녀는 다시 요염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물어볼게...크리스마스 이브엔 약속 있어?"

  "아뇨...딱히..." (축음기냐? 아까 친 대사랑 중복이잖아.)

  "그럼 나랑 케이크 팔자. 거절은 받지 않아...♡"

  약속한 거다? 부드러운 마쉬멜로우 너머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를 남기고, 토우지 미키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누군가가 어깨를 퍽 하고 치는 느낌에 얼떨떨한 상태로 뒤돌아보자, 튀김 가게 아줌마가 큰 목소리로 "너 이녀석, 제법이잖니?"라고 말했다.



4444

  크리스마스 이브는 평일이었다. 세간은 연인들의 성야다 가족과 함께 치킨 먹는 날이다 떠들썩하지만, 방학식을 이틀 앞둔 우리 학교는 평소와 다를 것도 없이 수업 시수를 꽉 채우고 3시에 해방령을 내렸다. 막연하게 미스테리부 부실로 향하려다, 토우지 선배와 일일 알바를 같이 하기로 했던 게 생각나 3학년 B반으로 그녀를 데리러 갔다.

  "자, 이거."

  빵집 뒷편에서 사장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새빨간 천, 하얀 단추와 하얀 털, 삼각 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윽…이런 구린 옷을 입어야 된다고는 말 안 했잖아요!"

  "잔말 말고 입어. 수염도 꼭 달아야 돼♡"

  그나마 토우지 선배는 산타걸 복장이었다. 이거 남녀차별 아니야? 라고 하려다가, 이 엄동설한에 미니스커트는 상당한 정신력을 필요로 할 것 같아 관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한 쌍의 산타가 되어 케이크 상자가 가득 쌓인 매대 앞에 서 있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발걸음을 멈추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원하는 아이가 딸린 주부에게 케이크를 하나 팔았을 때, 불쑥 슌도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잠깐만, 가짜 수염 달고 행복한 가족들에게 양과자 팔고 있을 때가 아니야. 뭔가 까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크리스마스 파티!"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냈더니, 토우지 선배가 동그랗게 뜬 토끼 눈으로 이 쪽을 쳐다봤다. 마침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쩌죠. 슌...부장이 이것저것 많이 준비한 모양이던데. 새카맣게 잊고 있었어요."

  "아아, 그거..." 빨간 어깨를 으쓱하면서 선배가 말했다. "이브가 아니라 당일에 모이는 거잖아?"

  "에?"

  "그러니까, 24일이 아닌 25일에 말이야. 교문은 어차피 해가 지면 닫히잖아. 파티는 내일 낮이야."

  "아아…난 또."

  슌도는 삐지면 꽤나 귀찮아지니까, 부원의 50%가 이벤트에 노쇼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25일 낮에 만나자고 얘기를 했었던가? 영 기억이 나지 않는데.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커플 한 쌍이 부쉬 드 노엘을 가리키며 가격을 물어와서, 나는 완전히 장사 모드로 들어가 버렸다.

  4시 반을 넘어서부터 조금씩 사람이 많아지더니, 퇴근 시간이 되자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을 꽉 채우는 지독하게 긴 피크타임이었다. 이 작은 도시의 모든 주민이 이 가게에서 생크림 딸기 케이크와 부쉬 드 노엘을 사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밤 11시, 1년 중 최고 매출을 달성한 사장이 피곤하지만 충만한 표정으로 시급을 정산해 줬고, 나와 토우지 미키는 기념으로 받은 산타 모자를 머리에 얹은 채 하나둘 셔터를 내리는 상점가를 나란히 걸어가게 됐다.

  "재미있었다. 그치…♡"

  "네…생각보다요."

  "생각보다? 어떨 줄 알았길래 그래?"

  "춥고 정신없기만 할 줄 알았죠. 그런데 케이크 파는 동안엔 자꾸 움직여서 더울 정도였어요…"

  "그럼 지금은?"

  "지금…요?"

  "지금은 춥다는 뜻이야?"  

  이게 무슨 의미지? 내가 되묻기 전에, 뱀처럼 재빠른 손이 코트 주머니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토우지 선배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작고 보드랍고 뽀얀 손의 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토우지…선배?"

  "이름으로 불러줘. 몇 번이나 말 했는데."

  튀김 가게 아줌마…전 제법인 게 맞을지도 몰라요. 뜬금없이 머리속에 나타나 따봉을 날리는 아줌마의 환영을 뒤로 치우며, 네인지 녜인지 모를 대답을 간신히 돌려줬다.

  "그럼…미키 씨."

  "응, 듣기 좋네. 난 모가밍이라고 해도 돼?"

  "이름이 아니라요?"

  "에이 군이 부르는 거, 귀여워 보였거든...♡"

  아케이드의 입구에서 눈발이 날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찬 바람이 뜨거운 뺨에 부딪히는 게 너무 생생해 온도차에 얼어죽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토우지 선배—미키의 손을 힘주어 쥐자, 작게 웃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간여행자는 찾았어?"

  "…아?"

  "이브 날까지 찾는 규칙이었잖아."

  "아, 그건 뭐…"

  솔직히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아요. 미키 씨랑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데. 차마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핑계를 찾아 둘러댔다.

  "부장이랑 사가 선배한테 물어봤는데, 둘이 상충되는 힌트를 줘서요. 골치 아파서 그냥 포기했어요."

  "뭐라고 했길래?"

  "뭐라더라...부장은 없는 규칙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사가 선배는 규칙을 만들라고 했어요. 이야기의 규칙? 법칙? 이라던가."

  "흐응...사키 쨩이 제법 큰 힌트를 줬네."

  미키는 재미있다는 듯이 코끝으로 살짝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애초에 따라할 수 없는 힌트였는걸. 못됐어. 모가밍은 할 수 없는 일인데..."

  "뭘...요? 왜 저는 못 하는데요?"  

  후훗 웃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에서 손이 빠져나갔다. 토우지 미키는 이제 코트 등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그녀가 뱅그르 돌자, 길고 어두운 색의 머리카락이 노란색 가스등 빛에 녹아들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Happy Christmas, Kyoko.

  Happy Chiristmas, Julian.

  팝송이었다. 영어듣기엔 자신이 없는 나라도 명확히 크리스마스 시즌 노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멜로디 중간에 챙챙 방울 소리가 울렸으니까.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어느 가게의 쇼윈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 그 아이...에이 군이 즐거워하는 걸 보는 게 제법 좋구..."

  미키가 중얼거렸다. 상점가의 풍경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뒤로 걷고 꼬마 전구와 포인세티아 리스에 뿌려진 반짝이가 선을 이루어 흘렀다. 어느새 머리 위엔 아케이드의 천장이 없고, 흰 눈발이 우리의 머리 위로 내리고 있었다. 미키는 한번 더 입술을 벌렸다. 하늘의 색이 너무 빠르게 휙휙 바뀌어, 미키가 중얼거리면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보다 더 명확히 듣기 위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네가 어디 가버리지 않고 여기 있는 게 좋거든..."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 풍경 때문일 것이다. 꼴사납게 미끄러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토우지 미키가 다시 손을 잡아주면 좋을텐데. 어쩐지 공중에서 떨어지는 듯한 기분으로,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갔다─

  "싫어~~싫어싫어!"

  "우와아앗?!"

  하늘에서 여자아이, 아니 겨울 잠바를 입은 소년이 떨어졌다. 그림처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와 미키 사이에 착지하는가 싶더니, 균형을 잃고 휘익 미키 쪽으로 넘어졌다.

  쿵!

  두 사람이 겹쳐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내 옆에 또 하나의 인영이 떨어졌다. 이 쪽은 순록 머리띠를 쓴 사가 무라사키였다.

  "뭐야? 뭔데 이게??"

  "으윽...여, 역시 낙법은 이론만 아, 안다고 되는 게 아니네, 요..."

  흐트러진 주황 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올리며 사가 선배가 한탄했다. 엉덩방아를 찧어 교복 스커트가 넘어갈락말락한 걸 보고 재빨리 슌도와 미키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이 쪽은 더 가관이었다. 사가 무라사키와 똑같은 갈색 순록 머리띠가 꼴사납게 걸쳐진 단발머리, 그 머리가 토우지 미키의 (이 단어는 미스테리부에 의해 검열되었습니다)컵에─

  "바보…! 이러면 시간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잖아!"

  미키가 빨개진 얼굴로 슌도를 밀어 일으키며 타박했다. 돌아가던 하늘은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초저녁 하늘의 개밥바라기별이 보였다. 머리띠를 고쳐 쓴 사가 선배와 내가 마주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미키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돌리지 않으면 나, 내년에 졸업해 버리는데...이래도 괜찮은 거야?!"

  "흥, 몰라요!"

  슌도도 만만치 않게 높은 목소리로 팩 쏘아붙였다. 이어 다다다다 기관총처럼 빠른 문장의 속사가 이어졌다.

  "늘 모른 척하고 밋키한테 선물을 양보했는데, 이번만은 선을 넘었어! 모가밍이랑 밋키가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되게 놔둘 바에야…이번 선물은 내가 받아버릴 거예요!"

  미키의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은 채, 슌도는 단단히 결심한 듯 숨을 들이쉬었다. 쪽, 하는 소리가 나며 입술과 입술이 맞닿더니, 미스테리부 부장이 뿌듯하게 선언했다.

  "시간여행자, 발견!"

 

2. 거룩한 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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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며칠이죠?」

  「24일」

  「성탄전야네요」

  「어떤 시간대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의사가 머뭇거리다 결국 실토했다. 「당신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상병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잔해로 보건대 폭탄이었어요」 의사는 콧등 위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말을 이었다. 「송출된 신호를 수신한 함선 중 우리가 유일하게 궤도를 틀어 구조 요청에 응했습니다. 당신은 유일한 생존자였구요」

  「그러나 지금은 죽어가고 있군요」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부상병은 고개를 힘겹게 비틀어 움직였다. 시야에 들어온 천장이 새하얬다. 패널 간 이음매가 드러나지 않는 최신식 우주선이었다.

  「이 배는 지구연합 산하의 연구기관 소속 함선이에요. 모나코 협약에 의거하여 항해 목적이 학술 연구인 함선 내부는 중립지대이며 저를 포함한 승무원들은 전쟁에 일절 관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안전은 보장되어 있으며,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곧 북미 대륙에 착륙할 거예요」

  「그 정보가 제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건 선생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부상병이 단축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수명을 넌지시 가리켜 말했다.

  「설사 당신이 생존하지 못한다고 한들 제가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예요」

  의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배는 순항 중이었다. 아무런 충격도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부상병이 갑작스레 신음했다. 의사는 당황하지 않고 링거의 노즐을 돌려 투여량을 늘렸다. 그는 모든 종류의 대인 행위를 곤혹하게 여겼지만, 아파 견딜 수 없어 하는 환자를 대면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그의 머릿속 의학 서적을 펼쳐 증상을 대조하고 마땅한 처방을 내리면 끝이었다. 춤을 추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상대와 호흡을 맞출 필요도, 기분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폭발의 여파로 손등에는 화상을 입었고 뺨은 기체의 파편에 긁혀 자잘한 상처가 났다. 그 밖의 외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충격파를 맞고 밀려나며 복부 내부에 출혈이 발생했고, 어딘가에 후두부를 부딪쳐 기절한 정황을 추론할 수 있었다.

  고통으로 얼룩졌던 얼굴이 점차 느슨해졌다.

  「진통제를 투약한 겁니까?」

  「그래요」

  「한결 낫네요」

  「강력한 약물이니까요. 지구에서도 한정적으로만 처방 받을 수 있고, 콜로니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제게 자비를 베풀었군요」 이번에는 훨씬 노골적으로 부상병이 덧붙였다. 「중독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한부 목숨이니」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신을 해하지 않아요」

  의사의 장담에 부상병이 가늠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군인이고, 선생님은 제압하기 어려운 상대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절 협박하시는 거라면, 유감이군요…」

  의사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부상병의 표정은 위협적이지 않았고 의사 역시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차분하다 못해 평화로웠다. 두 쌍의 시선이 무의미하게 교차했다.

  짧은 대치 끝에 부상병은 목덜미의 힘을 풀고 베갯잇에 뒤통수를 편히 누였다. 

  「내가 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노래죠. 어머니는 성가대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신을 믿으셨냐고요? 예, 아주 독실한 분이셨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와 신앙이 멸종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자라고 난 다음 돌이켜 보니, 어머니는 그저 외로우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가족은 어머니와 저, 두 사람으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떠났을지도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친척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고, 버리거나 숨기셨는지 어느 시점부터는 남은 사진 몇 장마저도 찾아볼 수 없었죠. 우리는 그리 가까운 모자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저와 어머니 모두 수줍음이 많고 내향적인 사람들이었기에 기억 속의 집은 늘 다소 적막했습니다.

  하지만 매주 일요일, 성당에 가는 날 아침이면 우리 집에도 제법 활기가 돌았습니다. 어머니는 부지런히 가장 좋은 원피스를 꺼내 입고 제 옷매무새도 점검하셨죠. 그 무렵 새로 부임한 주임 신부님께서는 무척 젊고 훤칠한 분이셔서 기다란 의자가 사람들로 꽉꽉 차 있던 기억이 납니다. 글쎄요. 제 기억 속 어머니의 신앙심에도 그런 세속적인 부분이 관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포교를 목적으로 일부러 좌초되지는 않았으니까요. 이 자리에 누워 계명과 복음을 줄줄이 읊을 예정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류가 언제 처음으로 달에 닿았는지 아십니까? 네, 하늘에 떠 있는 달 말입니다. 맞습니다. 백 년도 더 전이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사건은 음해하고 의심하길 좋아하는 공상가들의 먹잇감이었지만, 그해 인류가 달에 발을 디뎠다는 건 이제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 덕에 인류가 달을, 이어서 우주를 정복할 수 있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달에 가 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그건 신기한 일이네요. 이렇게 좋은 배에 타시는데도요. 하긴, 그곳은 후기 콜로니들에 비해 개발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여전히 척박한 편이니까요. 관광지로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듬해 한 밴드가 해체했습니다. 인류가 달에 다다른 바로 다음 해의 일입니다. 제 어머니가 믿는 신의 아들보다 유명하다고 주장한, 그 오만마저도 지탄당하지 않고 사랑받았던 가수들이요.」

  부상병이 작게 콜록거렸다. 의사는 그에게 잔을 건넸다. 미지근한 물을 꿀꺽꿀꺽 삼킨 환자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 중 가장 재능 있고 인기가 많았던 남자는 끝내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젊은 나이였죠. 그는 전쟁은 끝났다고 노래했습니다. 인류가 달에 다다르고,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준 동료들과 갈라서고 나서, 그는 평화를 기원했죠. 어머니는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일련의 사건들에, 그들을 향한 어머니의 애정과 역사 사이에 어떠한 거시적인 계획이, 제가 알지 못하는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공상하고는 했습니다. 달 착륙, 해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그 가수의 죽음…」

  「만족스러운 결론이 있었나요?」

  「아니오. 어린 날의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어째서 지금 저에게…」

  남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의사의 진단은 좀처럼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충족적인 예언과도 같은 구석이 있어서, 일부러 그에 맞춘 듯이 환자들의 증상이 달라지기도 했다.

  「선생님은 무척 똑똑한 분이지만 두 가지 오류를 범하셨습니다」 부상병이 말했다. 「첫째, 제 고향은 지구가 아닙니다. 저는 달에서 자랐습니다. 2세대 콜로니 주민이죠」

  부상병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의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앉히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병사는 우주에서 표류하다 다쳐 조금 전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무시무시하게 셌다.

  「둘째, 이 배는 착륙하지 않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뜻이죠?」

  「벗어날 수 없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부상병이 선체 내부의 벽을 손끝으로 짚었다. 「선생님, 아십니까? 지구군은 강력합니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전략적인 면에서도 늘 우리를 앞서 나갔죠. 그러나 결코 줄일 수 없는 격차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한 가지.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대열을 정비하고 전략을 세울 시간이요.」

  의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은 헬륨-3처럼 내키는 대로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은 아닐 텐데요」

  그 말에 부상병이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우스운 생각이 떠올라서」

  「무엇이 우스우신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을 비웃으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과학 이론에 관해서는 분명 선생님께서 저보다 훨씬 많이 아실 겁니다. 저는 일개 군인일 뿐이니까요. 오히려 선생님께서는 정답에 근접하셨습니다. 시간을 채굴한다. 굉장히 탐욕스럽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무척 독특하고 기발하기도 하고요. 콜로니에도 그 개념을 제시한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지구연합 이전 시대에 무차별하게 달의 자원을 독점하려고 했던 국가의 지배적 인종을 닮아서, 군에서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 핏줄에 헛된 욕망이 흐르는 것이라고 험담하고는 했습니다. 결국은 험담하던 이들이 아니라 그가 옳았던 거죠. 제가 웃은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시공간을 유전이나 광산처럼 다룬다면, 시추 작업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로서는 모르겠군요」

  「우리가 발견한 좌표는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한 차원 이상의 존재가 선생님과 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군요.

  그것은 저와 선생님의 짧은 조우를 들여다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우주 공간 안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대화하도록 만들죠. 저는 이따금 그것이 가난한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수중에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한정적이라서, 같은 인형으로 다른 상황을 몇 번이고 재현하는 어린아이요」

  의사가 그려낸 인상은 사뭇 달랐다. 그는 한 영화의 같은 구간을 계속 반복하여 돌려 보는 고독한 관객을 떠올렸다.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듯이….

  부상병이 능숙하게 선내에 설치된 홀로그램 재생기를 작동시켰다.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익숙한지 혹은 낯선지, 의사는 판단을 유보했다.

  「제가 이 노래에 언제쯤 질릴지 내기를 해볼까요」

  안경 너머에서 자색 눈동자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부상병은 의사의 침묵을 판돈으로 받아들였다.

  「현명하시군요, 선생님. 실은 이미 한참 전에 질렸거든요」

  「…제게 너무 여러 번 들려줬기 때문인가요?」

  「아니오. 말했잖아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고요」

  부상병이 씩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저 위를 보세요, 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