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Moonshine] 9천만 년에 한 번

2022. 11. 25. 22:52

1.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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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방송부는 스피커를 과용하고 있었다. 키체르 쥬는 빨간 코 순록도 썰매도 없이 튼튼한 두 발로 걸어 등교했다. 주차장에서 현관까지 얼마나 걸었을까? 물리학이 지난 루프를 인정한다면 5396걸음이다. 하루가 초기화될 때 신체적 피로도 초기화됐다. 당장 그의 지식수준에서 몸으로는 하루를 반복한다는 걸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심리적 요인은? 식을 풀어 증명할 수도, 머리를 갈라 보일 수도 없다. 19걸음을 284번째 반복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키체르는 북적거리는 학생들을 구경하며 사물함이 늘어진 복도로 향했다. 코너를 도는 순간 위협적으로 벌어진 어깨와 부딪혔다.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우측 통행하는 나라에서 오른쪽 벽에 붙다시피 걷는 사람과 앞 어깨를 부딪쳤다면, 그것은 고의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봤을 테니까. 몸이 홱 돌아가 어깨 주인과 대면하게 됐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어, 전학생.”
“다니엘.”
‘그것 봐.’ 키체르는 생각했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순서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지.
“미….” 다니엘은 키체르의 공허한 사과를 끊고 실실 웃었다.
“그건 됐고. 마침 잘 만났네. 특별히 전학생에게 해줄 말이 있거든.”
키체르는 바쁘게 움직이는 입술을 잠자코 바라봤다. 인내이기도 체념이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할 것 같냐? 응?”
성실히 답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키체르는 해 보라는 심정이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말은 안 돼. ‘우리’로 시작하지 마.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에프 워드로 수식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고. 레퍼토리를 벗어나, 레퍼토리를 벗어나, 레퍼토리를 벗어나….
“모르겠어.” 사실, 이 대답은 거짓말이었다. 
다니엘은 아주 만족스럽고 하찮은 것을 보는 눈빛으로 일관했다. 짝짝 씹던 껌을 키체르의 단정한 스니커즈 옆에 뱉고 발꿈치로 지그시 눌렀다. 뒤에서 풉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성원에 힘입어 그가 외치기를, “오늘 빌어먹게 멋진 이브 보내라고!”
‘몇 번이나 더?’ 키체르는 피곤했다. “고마워, 너도.” 그러고는 사물함이 늘어진 복도를 마저 걸었다. “화장실 변기처럼 꽉 막힌 저 영국 새끼 좀 봐!”, “‘고마워. 너도.’”, “야, 넌 안 되겠다! 저 좆같은 포쉬! 재수 없어야 완벽해.”라며 왁자지껄 떠드는 미식축구 선수들을 뒤로한 채 사물함 문과 마주했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수업 시작 10분 전까지도 캐럴을 트는 산타 요정이라니. 요란한 설정에 진절머리가 났다. 키체르는 사물함에서 지구과학 교재를 꺼냈다. 과목 담당 가드너 선생은 수업 중 사담이 잦은 편이었는데, 본인이 강단에서 화성 지질 환경을 떠들든 서커스를 하든 교재를 꺼내기는 하라는 주의였다. 키체르는 그 충고를 떠올리며 교실에 들어갔다.
그는 책상 위의 크리스마스 특집 교내 신문을 펼쳤다.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를 선택하는 현명한 방법―때로는 초대를 거절하라, 주님의 탄신을 기립시다(독실하기로 저명한 알렉스의 투고였다), 마약·방화·총기를 조심하라는 교장의 축사, 크리스마스 연인을 위한 지침 십계명을 읽었다. 기사 작성 줄리아 리만. 편집 카란델마야 바페타. 이 애들도 293번 내내 같은 기사를 썼을까. 지루했겠다.
1교시 종이 울렸다. 물론 수업 종이 머릿속에서 울렸는지 소리를 실제로 들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지루했다.
가드너 선생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뚫고 들어왔다. “자,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선창하자, “메리 크리스마스, 가드너 선생님.” C반이 입 모아 외쳤다. 
“오늘은 일전에 공지한 수행평가에 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 영상을 보여줄 거다. 끝난 뒤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어.” 그는 다중 우주 이론에 대한 과학 시간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키체르는 견디는 데 싫증 나 뒷문을 열고 교실에서 나갔다. “거기, 쥬! 뭐하는 짓이냐!” 가드너 선생이 뒤따라 나왔다. 그때 전화가 왔다. 연락처에 등록하지 않은 번호였다.
“죄송합니다. 멋대로 교실을 이탈해서…” 키체르는 성의 없이 설명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키체르! 키체르 쥬 맞지? 너 에이미가 여는 파티 꼭 와야 해!” 내용은 싱겁게도 그 다그침이 끝이었다. 뚝 끊기는 효과음이 났다. 차라리 심각한 용건이라도 말하지, 실종, 사고, 부도, 종류도 많은데, 겨우 파티라니! 귀찮은 변명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그는 불현듯 초조함에 달았다. 터치다운 세리머니처럼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314번째, 키체르의 사물함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물함의 문을 잡아당기자 덜컹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그는 가방에서 얇은 책자를 꺼내 문틈에 집어넣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운데에 걸리는 물건이 있었다. 펜을 문 안쪽에 걸어둔 것이다. 부디, 펜 종류라도 달라졌다면 좋겠다. 키체르는 행정실 직원에게 부탁해 절단 도구를 빌렸다. 하교하기 전까지 꼭 반납해달라는 말을 177번째 들었다. 
플라스틱 몸체와 카트리지를 끊자 잉크가 흘렀다. 손수건을 꺼내 손과 사물함 내부를 닦았다. 몇 번째였더라. 오후쯤 비슷한 수작에 당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지나쳤고, 언젠가는 절단기를 가지고 있다가 바로 건넸고, 또 한 번은 자신의 사물함을 열자마자 나중에 필요할 거라며 미리 주었고, 최근―그러니까, 300번째쯤―에는 그가 겪을 경위를 경고하며 주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314번째다. 조쉬 맥밀런에게 크리스마스이브를 끝낼 단서는 없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키체르는 전투적으로 걸었다. 그를 언짢게 만들었던 최초의 인물부터 차근차근 치우기로 결심한 태도였다. 첫 시도는 먼 복도를 돌아 교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식축구부 무리는 어깨를 부딪쳐왔다. 다음으로 선택한 방법은 싸움이었다. 그는 뒤돌아 요구했다. “그 말은 심하지 않니?” 그러자 그들은 떠나갈 듯이 웃었다. 웃는 얼굴이 짜증 나서 얼굴을 쳤다. 그랬더니 하루 종일 교무실과 경찰서와 양호실에 오가야 했다. 자신이 살을 찢고 시퍼렇게 멍들인 얼굴을 보며 키체르는 깨달았다. 다니엘 마르티네스도 아니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385번째 점심시간에도 방송부는 앤디 윌리엄스를 선택했다. 지고지순한 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코러스가 노래할 때 풋볼이 키체르의 등을 때린다. 한 박자 늦게 이동한 적도, 빠르게 이동한 적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맞물리지 않으면 공은 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부러 맞아줄 생각이었다. 타격감이 등에 전해졌다. 키체르는 땅에 떨어진 공을 주웠다. “야, 미안하다! 그것 좀 이리 줘!” 그렇게 소리치는 입에 공을 메어꽂았다. 드문드문 박수 소리, “와우”, 저 쌍놈의 자식, 잡다한 욕설이 난무했다. 이름 모를 쿼터백도 아니었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키체르는 카쉬눈닐 고교 현관으로 들어섰다. 조잡한 샹들리에, 그 끝에 닿은 가짜 전나무, 조그만 소켓과 양모 공예 장신구,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전에 있던 학교가 그리웠다. 그곳은 전나무 화분을 트리로 두었다. 커다랗고 흙냄새를 고스란히 담은 식물 말이다. 전구도 달지 않았다. 살아 숨 쉬니까. 키체르는 미련 없이 가짜 트리를 시야 밖으로 보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무엇을 해야 하지? 크리스마스이브를 412번 겪지 않는 사람은 어떤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낸단 말인가? 아아, 사랑이 모자라 받는 벌인가? 디킨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키체르는 그들이 어째서 사랑스러운지 알아야 했다. 주변에서 어떤 파티에 참석할지 즐겁게 떠드는 또래 얼굴에는 자신과 같은 짜증이 없어 보였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키체르는 캐럴을 배경 음악 취급하며 수다 떠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안녕.”
난데없는 인사에 그들의 눈썹이 올라갔다. “안녕.” 말끝이 올라가는 억양이었다. “네가 인사할 줄은 몰랐는데,”
키체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하니?” 떠들던 이들의 얼굴에 점점 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그래도 예의를 지키며 답해주었다.
“선물 상자를 열어.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가 아직 산타를 믿는 줄 아셔서.”
“난 어밴던트 캘린더를 열 거야. 내 건 향수거든. 그걸 뿌리고 마이클네 파티에 가려구.”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선물을 열 수 없었고 어밴던트 캘린더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제시한 것 중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키체르는 고맙다고 대꾸했다. 곧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는 끌고 온 캐딜락 운전석에 앉아 다음을 기다렸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심지어 도서실에도 캐럴을 틀었다. 키체르는 유리를 깨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탐문을 시작했다.
“안녕.”
도서부는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도서실을 지키고 있었다.
“오, 카이다.”
“카이가 왔네. 무슨 일이지?”
‘카이?’ 그들끼리 속삭이는 말을 모르는 체하고 키체르가 물었다. “너희는 크리스마스에 무얼 할 거니?”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숨을 재빨리 들이쉬더니 우다다 말을 뱉었다. “정말이지 흥미로운 질문이구나. 난 좋아하는 애에게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를 받고 싶어.” 그를 둘러싼 아이들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린, 그건 계획이 아니잖아. 네 바람이지.”, “이해해 줘, 카이. 저 애의 오랜 로망이거든.”
키체르는 그보다도 궁금한 게 있었다. “물론이야. 그런데, ‘카이’는 내 별명이니?” 그러자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땋은 사람이 설명해주었다. “오, 이런.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맞아, 우리끼리 부르는 네 별명이야. ‘눈의 여왕’에서 따왔어.”
“쥬, 난 반대했어.” 이번에는 더티 블론드를 깔끔히 빗어넘긴 사람이 부연했다. “제대로 대화한 적도 없는 사람에게 별명을 붙이는 건 둘째 치고, 네가 소년은 아니잖아.”
오로지 크리스마스이브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다 그것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신선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에는 뭘 할 거야?”
넌 카이는 아니라고 설명한 사람이 답했다. ‘끈질기군,’ 평가하는 기색이었다. “우린 제시네 집에서 영화 볼 거야.”
“내일은?” 키체르가 묻자마자 전화 알림이 울렸다. 그는 목을 숙여 정성스럽게 답해준 세 사람에게 인사하고 도서실에서 나왔다. 등록하지 않은 번호였다. 착신 버튼을 눌렀다. “야! 키체르 쥬! 제발 에이미네 집 오는 길 잃지 마! 똑바로, 곧장 오란 말이야! 내가 몇 번이나 너한테 파티 오라고 했는지 넌 모르지?” 몰아치는 그 말로 통화는 끝이었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키체르는 복도에서 마주칠 다니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했다.
“안녕, 다니엘. 빌어먹게 멋진 크리스마스이브 보내. 물어볼 게 있는데.”
다니엘은 한쪽 눈썹을 올리며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뭐냐?”
“넌 크리스마스이브에 무엇을 하니?” 키체르는 기계처럼 질문했다. 다니엘과 그의 수하들이 동시에 어리둥절해했다. “하! 크리스마스이브에 무얼 하느냐고?” 그 말을 필두로 폭소가 파도처럼 번졌다. “친히 알려줘야겠네!”, “뭐 하냐, 다니엘? 저 재수 없는 영국 새끼에게 어서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줘!”
 “나는 말이지.” 다니엘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미식축구 선수들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그 소음 속에 다니엘은 느끼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주는 여자랑 섹스할 거야.”
“그렇구나.” 키체르는 섹스를 잠시 고려했다. 답은 쉬웠다. 이만한 기독교 국가에서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상대를 찾아 행위 하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닐 것 같았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하교하는 길에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조차 윌리엄스를 선택했다. 키체르는 짜증이 났다.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이보다 끔찍한 순간이 있단 말인가? 그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주파수를 다시 조정했다. “난롯불에 구울 마시멜로….” 각기 다른 목소리의 윌리엄스가 캐럴을 불렀다. “기쁘게 노래 부르며 내리는 눈….” 밤의 여왕처럼 윌리엄스가 노래했다. “무시무시한 유령 이야기도 있죠!” 그 옛날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함께 화물트럭이 키체르의 캐딜락을 들이받았다. 그러나 라디오는 꺼지지 않았다. 윌리엄스가 원래 목소리로 노래했다. “에이미네 파티에 와! 알아들었어?”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어이가 없군! 키체르는 주차하자마자 운전석에서 내려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카란델마야 바페타, 키체르가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영국 중산층 뉴페이스라며 루머와 가십을 꿰매 기사를 써붙인 그 애는 A반이었다. 키체르는 성큼성큼 걸어가 카란델마야를 찾았다. 그는 교실 창가에 기대 서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 속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과 영상통화로 대화하고 있었다.
“바페타.” 키체르가 섬뜩한 목소리로 카란델마야를 불렀다.
“누가 나 부른다. 이따 파티 가기 전에 전화할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카란델마야가 그제야 키체르를 봤다. “키체르 쥬? 네가 무슨 일이야?”
“도대체 에이미네 파티에는 왜 오라고 하는 거야?” 키체르가 카란델마야를 노려봤다.
카란델마야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언제?”
“분명 너였어. 가드너 선생님 수업에서, 조쉬에게 충고하기 직전, 문학부 애들이랑 있을 때, 네가 전화했다고. 몇 번이나 네 할 말만 했어. 뭐라도 물으려는 순간…”
“야, 잠깐. 그거 나 아냐.” 카란델마야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 똑바로 찾아! 난 너 같은 애 파티에 데려갈 생각 없어!” 항변하고는 뒤돌아 교실을 빠져나갔다.
키체르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골랐다. ‘’사람 똑바로 찾아’? 카란델마야 바페타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이지?’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아니, 자신을 부른 건 카란델마야였다. 다만 ‘자신을 부른’ 카란델마야를 찾기가 까다로웠다. 학교에 있는 카란델마야는 누구도 아니었다. 다니엘에게 어깨를 부딪히고, 미식축구부에게 비웃음을 사고, 다중 우주에 관한 영상을 보고, 사물함에 묻은 잉크를 닦고, 풋볼에 맞고, 기어가 고장 난 캐딜락과 씨름한 뒤, 에이미네 저택에 간다. 그곳에도 카란델마야 바페타가 있다.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매번 만나지 못했다. 만나더라도 내가 널 언제 불렀냐며 따지는 금색 눈동자만 있었다. 그는 카란델마야와 외관이 아주 흡사한 인물일 뿐이었다.
664번째 크리스마스이브다. 키체르는 닳았고 결연했다. 

 

2.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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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란델마야는 저택의 문앞에 서 있다. 낡은 손목시계의 분침은 한 칸씩 옮겨갈 때마다 크게 삐걱인다. 발랄한 캐롤이 조금 열린 문틈으로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이르게 어두워지는 하늘 따라 유리창 너머의 노란 조명이 더욱 생기있게 빛났다. 다섯 시 십칠 분 십일 초. 피자 배달부의 오토바이가 대문 앞에 멈추어 선다. 그는 피자 열한 판을 꺼낸다. 초침이 다시 한 바퀴를 돌아 3을 조금 지났을 때 카란델마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피자 배달부는 가끔 마야를 보며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고, 보통 피곤한 낯을 한 채 초인종을 눌렀다. 어쨌든 오십일 초가 되면 배달부는 초인종을 눌렀다. 속으로 일곱까지 세면 무언가 짧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흔들리고, 깔깔대는 웃음 끝에 문이 열린다. 허리까지 떨어지는 금발을 높게 묶은 에이미가 환히 웃으며 마야를 반긴다.
“왔구나! 빨리 들어와, 마야… 바페타!”

 
카란델마야는 시계를 확인한다. 다섯 시 십팔 분 칠 초. 문이 열리는 건 매번 이 시간이고, 이번이 백 쉰 일곱 번째, 아니 쉰 여덟, 어쩌면 예순 한 번째로 열리는 파티다.
네 번째 파티까지는 이름을 알거나 반만 알거나 가늠조차 안 되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고 가끔 달라지는 노래 속에서 춤을 췄다. 제대로 망친 시험이나 카란델마야가 학교 신문에 쓴 뉴페이스(걔는 초대 받았어? 글쎄.)에 대한 기사, 상대방의 망친 연애 따위에 대해 얘기하다 시계를 보면 꼭 여섯 시 이십삼 분이었다. 다시 상대방을 돌아보면 잘 꾸며진 앞마당이 보이고, 시계는 다섯 시 십육 분을 가리킨다. 피자 배달부, 에이미, 그리고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두 번에 한 번은 엘리노어가 멍하니 있는 카란델마야에게 춤 안 춰? 하고 물었다. 네 번째 파티에서는 우연히 여섯 시 이십삼 분에 레녹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잠시 나갔다가 올 건데 혹시 돌아와서 배고프면 냉장고에 비프 스튜 끓여뒀으니까….) 끊은 후에는 일곱 시 사십일 분까지 무슨 짓을 해도 현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레녹스의 전화는 보통 파티 세 번에 한 번씩 걸려왔고 일곱 번을 거를 때도 있었으며 가끔은 연달아 왔다. 여섯 시 이십삼 분이 지나기 전에 전화를 먼저 걸면 외출 예정이 없다고 하거나 임레가 받았다. 시간과 전화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든 몇 번째 크리스마스부터는 여섯 시 십 분이 되면 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어떤 규칙성을 찾는 일은 평생 카란델마야의 몫이 아니었던지라 전화번호부에서 적당히 눈에 띄는 번호를 골랐다. 영 지겨울 때면 지브릴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티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신박한 행동이나 마음에 안 드는 애가 있을 때 골려줄 방법은 없는지, 크리스마스 다음에 낼 기사에는 어떤 얘길 실을지에 대해 물으면 지브릴은 혼자서도 오 분은 거뜬히 조잘거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제일 일반적이지 않아? 그래도 교제는 신중히 해야해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나랑 레녹스 씨한테 먼저… 물론 마야 말마따나 마야는 다 컸으니 참견하려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정말 많고….) 카란델마야는 그의 말을 들으며 보통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가끔 맥락 없이 울었다. 당황한 지브릴의 목소리가 꿈처럼 아득해지다 다시 현관 앞으로 돌아온 이후로 다섯 번은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마다 속으로 캐럴을 불렀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날…. 아쉽게도,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그와 비슷한 수많은 수식을 전부 가져다 붙여도 모자랄 만큼의 감정을 품은 채로 마법사로 태어나지 못한 걸 후회했다. 적어도 영화에나 나오는 마법사였으면 열두 번째 파티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갔을 터다. 참고 참고 또 다시 참다 결국 엉엉 울며 파티에 갇혀서 나가질 못하겠다고 토로하니 지브릴은 말을 아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 같아? 탓하는 건 아니고 일단 상황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으니까. 여태까지는 뭘 해봤어? 알아낸 건?) 그렇게 이십삼 분이 되면 어김없이 현관으로 돌아갔다. 또 가끔은 키체르 쥬한테 전화를 걸었다. 카란델마야가 아는 얼굴은 전부 이 집의 어딘가에 있는데 키체르만큼은 없다는 이유로. 파티에 왜 안 왔냐며 투덜거리는 동시에 그가 무슨 답을 할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안 왔냐고 투덜거리건 설마 에이미 집이 어디인지 모르냐고 묻건 돌아오는 답이 한결같았다. (어쩌라고?) 그럴 때면 데미안의 평이 떠올랐다. 싸가지 없는 새끼. 보통은 생각만 했지만 가끔은 실수로 입 밖으로 냈고, 키체르가 뭐? 하며 되묻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문학부에서 그를 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곱씹는다. 도서관에만 처박혀서 사니 키체르를 볼 일이 몇 번이나 있겠나. 어쩌면 그들의 상상력까지 더해져 고평가된 것이 분명하다. 하여간. 그러는 동안 전화 통화만 한 것은 아니고,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다니며 가도 되는 곳과 가면 안 될 곳이 어디인지, 먹어서는 안 될 음식과 먹어도 되는 음식은 무엇인지, 만나면 재미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배웠다. 매번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아니었는데 운이 좋으면 에그타르트 중에서도 완벽하게 익은 것을 먹을 수 있었고 운이 나쁘면 지난 파티에서 텅 비었던 방에서 옷을 반쯤 벗은 커플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비명을 지르거나 깔깔 웃거나 화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파티 내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전부 겪으니 이 파티에 대해 어떤 감상도 들지 않았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이라는 가사만이 귀에 박혔다.
그리고 다시 백 쉰 일곱, 아니면 여덟, 어쩌면 예순 세 번째 파티. 카란델마야는 복도를 따라 걸으며 보이는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젖혔다. 꿋꿋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술을 마시는 이의 얼굴을, 등을, 옆모습을 지겹게 보다보면 가끔 비명을 지르거나 문 한 뼘 열리기도 전에 세게 닫으며 노크 정도는 하라며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 특종이라며 소리치는 것도 문을 잠그면 되지 않냐며 대꾸하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적당히 빈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연하늘색 레이스가 달린 쿠션이 침대에 가득하고, 협탁에는 에이미의 가족 사진이 생크림과 체리 모형으로 꾸며진 액자에 담긴 채 단정히 올려져 있다. 카란델마야는 액자를 집어들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물결 한 점 일지 않는 호수와 낮게 자란 풀밭. 가운데 자리를 잡은 세 사람과 그들에게 달려가는 이의 뒷모습. 카란델마야는 서로를 아주 혹은 어렴풋이 닮은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시선은 금세 액자 유리에 어렴풋이 비추어지는 제 눈으로 옮겨간다. 손끝으로 눈꼬리를 조금 내리거나 눈을 반만 뜨며 떠오르는 모든 얼굴을 흉내낸다. 남들은 그 이름의 언저리도 떠올리지 못 할 것을 안다. 카란델마야는 휴대폰을 집어든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어조로 같은 답을 하는 이들을 걸러내다보면 수많은 전화번호 사이에서도 연락할 만한 이의 이름은 몇 남지 않는다. 지난 파티에서는 엔야에게 전화를 걸었으므로 (사실 그가 하는 답은 매번 같지만.) 이번에는 다시 키체르의 차례다. 수신음이 한참 이어지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안내를 끝으로 툭 끊는다. 다시 걸면, 몇 번의 수신음 끝에 똑같은 안내음이 이어진다.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여보세요? 겨우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너한테 전화 한 번 하려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전화 끊으면 바로 에이미 집으로,”

눈을 깜빡이면 현관 앞이다. 이쯤 되면 스트레스도 물성을 가지고서 머릿속 한 구석에 쌓여가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아악! 하고 소리지른다. 피자 배달부가 대문으로 들어서다 말고 놀란 눈으로 카란델마야를 본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자리에 웅크린다. 문이 열리고 에이미의 의아한 물음이 들려온다. (거기서 뭐 해?) 카란델마야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알아서 할게, 곧 들어갈게, 짜증나니까 말 걸지 마! 속에서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걸 그대로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발 뻗고 잔 게 언제적인지 알 수가 없다. 보통 한 번의 루프에 한 두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피곤했던가, 죽을 만큼 눈이 감기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 잠을 잘 필요도 없나. 형태만 겨우 잡아둔 둥지가 그리웠다. 아주 조금. 

“바페타?”
익숙한 목소리다. 제 이름보다는 심통부리는 쪽이 더 익숙한 목소리. 카란델마야는 슬쩍 고개를 튼다. 조금 떨어진 곳에 새하얀 스니커즈가 보인다. 저거 설마 파티 온다고 새로 산 건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것이 오해라 할지라도―웃긴 건 웃긴 거고, 할 말은 해야 했다. 
“내가 너한테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왜 이제 와? 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 알아? 진짜 짜증나!”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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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체르는 어떤 질문부터 답해야 할지 헤아리다 관뒀다. 그가 보기에 카란델마야 바페타도 무언가를 바라고 뱉은 말은 아니었다.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한 거다. 그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나라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냐.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내게 전화한’ 카란델마야 바페타를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데! 넌 고작 파티에 있었을 뿐이잖아.”
고작 파티. 카란델마야는 눈을 치뜨고 한참 그를 노려보았다. 이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알고 똑같은 답에 대꾸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백 번은 넘게 본 같은 시간의 현관문에 피자 배달부의 그림자가 어떤 식으로 지는지, 에이미와 에이미가 아닌 사람들의 발소리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의도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건 영 피로한 일이다. 다만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려니 다른 것보다도 귀찮았다.
“카란델마야 아콜라 푸세로 소나이 하브 루라 모레티 리에주 자느일 바페타야. 말 똑바로 해.”
키체르는 황당했다. “지금 네 미들네임 갯수가 중요해?” 
“중요해!”
키체르는 카란델마야가 그에게 단 한 번도 풀네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려던 찰나, 현관문이 열렸다. 기다란 금발이 빼꼼 나왔다. 피자 열 한 판을 든 피자 배달부가 반색했다. 에이미가 양손에 피자를 나누어 받고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에이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카란델마야에게 물었다.
“얘는 네 친구야?”
“… 음.” 카란델마야는 키체르에게 시선을 베풀었다. “그런 걸로 하자. 오는 길에 친해졌어.” 
키체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 사이 짧은 정적이 흘렀다. 에이미 홀로 어색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그렇구나, 잘 됐다! 이따 디제이도 올 거야. 둘이 얘기 나누고, 늦지 않게 들어와!” 그가 얼른 대꾸하고는 재빠르게 들어갔다. 키체르는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당연히 네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그것도 모르면서 왜 왔어? 너도 뭐 보고 들은 게 있을 것,”


“아냐!” 카란델마야는 에이미네 저택 현관에 있었다. 방금―’방금’이라는 표현이 옳은지는 차치하고―과 다른 점이 있다면 키체르 쥬가 없다는 거였다. 카란델마야는 키체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끊겼다. 개자식! 받지도 않고 끊었나? 카란델마야는 화면을 확인했다. 아니, 이번에는 곧바로 받은 거였다.
“키체르 쥬?”
“본인 맞아.”
“이거 이상해. 그래도 에이미 집 앞에서 다시 집 앞으로 돌아온 적은….”
카란델마야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키체르가 대꾸했다. “나도 이 시간에 돌아온 건 처음이야.” 정말 그랬다. 그의 루프는 아침에 시작됐으니 말이다. 카란델마야와 통화하는 지금은 오후 5시 17분이었다.
“그럼 빨리 와! 어쨌든 이 세계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루프 하는 사람은 일단 너랑 나뿐이라고.” 

고리타분한 영국 새끼. 카란델마야는 문득 떠오른 말을 곱씹었다. 이 외에 더 유명한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는 꼭 카란델마야가 세 걸음씩 앞서야 뒤를 따라왔다. 카란델마야는 다섯 걸음에 한 번씩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내가 놓치기라도 할까 봐? 넌 그럴 것 같아.) 엘리노어가 마야, 하고 운을 떼기도 전에 거절한다. (됐어, 지금은 그럴 기분 아니야!) 카란델마야의 뒤를 따르며 키체르는 목 뒤로 집요한 시선을 느낀다. 엘리노어는 다른 이에게 무어라 말하면서도 키체르를 힐끔댄다. (에이미가 카이도 초대를 했던가?) 카란델마야는 복도 왼편의 첫 번째 방에서 들려오는 노래로 남은 방에 들어차 있을 사람을 가늠하고, 복도 왼편 세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서재다. 그는 휴대폰을 키체르에게 떠넘기고서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어 앉는다.

“이제 곧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올 건데, 안 오면 다시 현관 앞으로 돌아오는 거야. 너 전에는 어디서 시작했어?”
“학교에서. 등교할 때.”

저보다는 그가 더 오래 고생했을 걸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시계만 멍하니 보고 있자니 더 시간이 안 갔다. 카란델마야는 눈을 감았다. 문틈으로 미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시계 초침 소리, 키체르의 숨소리. 키체르는 엘리노어에 대해 물었다. 카란델마야는 가끔, 혹은 연달아서 춤 안 추냐고 묻는 애라고 답했다. 책을 읽는 건지 만드는 건지 모를 북클럽에서 활동하고, 보통 이상한 이야기, 좋게 보면 낭만적이고 나쁘게 보면 허무맹랑한 소문의 출처라고까지 설명을 덧붙인다. 다시금 조용해진다.
“우리 내기하자.”
책장을 살피던 키체르가 카란델마야를 돌아본다. 뜬금없는 제안이다. 어떤? 짧게 묻자 카란델마야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킨다. 
“이번에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올지 안 올지로. 전화가 오면 네가 이기는 거고, 안 오면 내가 이기는 거야.”
뭘 걸지는 나중에 정하고. 작게 덧붙이며 다시 의자에 기댄다. 원하는 대로 믿고 싶지만 어쩐지 이번에도 전화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속으로 열다섯까지 세기도 전에 카란델마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키체르가 그 어떤 부피도 차지하지 않는 양 홀연히 혼자 나가다가도 문이 채 닫히기 전에 돌아본다. 나도 가야 돼? 키체르가 묻는다. 카란델마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혼자 가면 세 걸음 가서 엘리노어가 또 말 걸고 거기서 벗어나면 이상한 애들 싸움 구경하자고 끌려간단 말야. 너라도 있어야 핑계가 생기지. 주스만 마실 거니까 너도 와.”
결국 키체르 또한 따라나선다. 익숙한 옆모습. 엘리노어가 카란델마야를 돌아본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이다 키체르를 보고서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튼다. 금세 그들을 지나쳐가고 다른 무리에 섞여든다. 카란델마야는 전혀 개의치 않고, 키체르는 묵묵히 따라 걷는다. 번잡하지 않게 걸린 정물화나 액자, 칵테일 잔에 담긴 음료수를 술인 양 홀짝이는 아이들, 곳곳에 장식된 리스, 조잡하고 조그마한 산타 피규어, 가끔 구석에서 입 맞추는 커플이나 끊이지 않는 캐롤….
“그런데 지금 몇….” 
별안간 카란델마야가 자리에 멈추어 서 그를 돌아본다. 제대로 돌아보기도 전에 몸이 부딪힌다. 손에 쥔 오렌지 주스 잔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혹여 쏟기라도 할까 손을 뻗으나 그럴 새도 없이 놀란 카란델마야가 잔을 놓친다. 결국 키체르가 잡아채는 건 빈 잔을 쥔 손이다. 흰 스니커즈에 노란색 주스가 스며들고….

다시 현관이다. 카란델마야는 그의 신발을 힐긋 내려다 본다. 아주 희고 깨끗하다.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산 게 분명하다고 간단하게 확신한다. 키체르가 그래도, 하며 운을 떼는 걸 무시하고서 제 할 말부터 입 밖으로 낸다.
“시간이 문제야, 행동이 문제야?”
“6시 23분. 이유는 불규칙해. 같이 돌아온 건 손을 잡았기 때문인가?
“그럼 내가 이겼네.”
뭐가? 아까 그 내기 말이야. 피자배달부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카란델마야는 키체르의 손을 잡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간다. 현관으로 뛰어가는 에이미가 환히 웃으며 두 사람을 반긴다. (걘 누구야? 그냥 아는 애!) 다시 2층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카란델마야는 이미 지나간 내기와 그에 대한 보상, 못 마신 오렌지 주스, 과하게 작은 잔 따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2층 복도 입구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걷는다. 키체르가 가까운 방의 문고리를 잡고 돌릴 즈음에야 열어서 좋은 꼴 보긴 어려우리라고 짧게 충고한다. 키체르는 침대 아래에 쌓인 옷가지, 그리고 그 외 곱씹어봐야 하등 좋을 것 없는 장면들을 보고서 다시 닫는다. 마야! 다시 익숙한 목소리다. 엘리노어는 바로 지난번과 아주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똑같은 목소리로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카란델마야가 소리 지른다.
“피곤해 죽겠으니까 건들지 마! 말 걸지도 말고, 뭐! 너도 가! 가란 말야! 저리 가!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스트레스도 심하면 사람 죽는 거 몰라? 내가 오늘 쓰러지면 다 너네 탓이야. 가! 가라고!”
당황한 엘리노어가 자리에 멈추어 선다. (나는 그냥, 노래 바뀌어서, 네가 좋아하는 곡이니까, 알려주려고….) 카란델마야가 제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헤집는다. 아주 작은 툭, 소리와 함께 겨우 묶은 리본이 느슨해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현관이다.
카란델마야와 키체르는 익숙하게 2층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떤 방에도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들어가도 되는 방과 들어가면 곤혹스러운 방을 구분하기는 번거로웠다. 두 사람은 복도에서 회의했다. 카란델마야는 싸구려 사과주스 한 팩을 들고 높은 스툴에 앉았다. 그러니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마야, 춤 안 춰?”
카란델마야는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고 키체르는 눈만 깜빡였다. 질문 당사자인 엘리노어는 눈 깜빡이는 쪽을 지목하며 말했다.
“파트너 데려온 줄 알았는데.”
카란델마야는 눈을 까뒤집고 한숨을 쉬었다.
“얘가?”
“왜? 아냐?”
카란델마야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돌연 태도를 바꾸어 걸터앉았던 스툴에서 훌쩍 내려왔다. 
“아냐, 맞아. 가자. 춤추러.” 키체르에게는 속삭였다. “춤추면서 이야기해.”
댄스 플로어는 치어리더 무리와 그 애인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주어진 공간은 겨우 가로세로 세 걸음 남짓한 구석이었다. 스피커에서는 느린 노래가 흘러나왔다. “추측하건대 전기뱀장어도 사랑을 해요. 서로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지만요. 청어가 하는지는 왜 묻나요? 웨이터, 내게 청어알을 가져다줘요!”
“진심으로 춤을 추고 싶은 거니?”
“이걸로 끝날지 어떻게 알아? 발 좀 내 봐.”
카란델마야는 그렇게 말하며 키체르의 멱살을 잡고 하얀 스니커즈에 올라섰다. “너무 좁아서 어쩔 수 없어. 어정쩡하게 있지만 말고 내 뒤 좀 받쳐. 매너가 없네!”
키체르는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다. 하여튼 이곳은 파티였고, 이 세계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반복하는 사람은 그 자신과 이 애뿐이었으며, 이제는 정말이지 끝내고 싶었다. 그는 카란델마야의 등에 손을 얹고, 카란델마야가 자신의 팔을 잡게 했다.
“로봇처럼 움직이게 돼.”
“요즘 로봇은 무릎도 굽혀, 멍청아. 네 다리는 통나무처럼 움직이는 거지.”
“네가 내 발 위에 올라와 있어서 그래. 빙글빙글 도는 것만 할 수 있어.”
그 말대로 두 사람은 고장 난 오르골 인형처럼 하염없이 앞뒤로, 혹은 원을 그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지럽지는 않네.”
“난 어지러워. 몸에는 힘 빼고, 발에는 힘 줘. 그리고 옆을 봐.”
카란델마야는 고개를 돌렸다. 음식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각양각색 조명이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었고, 주변에 있는 사람이 각자 다른 춤을 췄다. 뭐가 어지럽다는 거야, 따지려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새로운 감각이 천천히 들어오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카란델마야는 현기증을 느꼈다. 동시에 새 노래가 이어졌다.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
“디제이 이 미친 자식아! 너는 캐럴을 길바닥이 아니라 파티에서 듣고 싶냐?” 강력한 항의였다. 디제이가 가운뎃손가락만 펼쳐 그 항의자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개 같은 새꺄! 너 같은 막귀 리스너는 이거나 들어야 해!” 라며 노래를 바꾸었다. “그러니 당장 환영과 축배는 집어치워. 가볼까? 하이이이이이잉…”
“…하긴.” 그 광경을 지켜본 카란델마야가 말했다. “난 이제 ‘일 년 중 가장 멋진 순간이에요’ 첫 소절만 들어도 구역질 나. 백여든여덟 번째 들어.”
그 말에는 키체르도 동의했다. 그는 잠깐 계산했다. “나는 육백예순여섯 번 들었어.”
“지브릴이랑 레녹스 스포티파이 계정에서도 곡 차단할 거야.” 키체르는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실내를 돌아보니 알래스카 썬더뻑 5000은 파티 현장을 떠났고,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저택을 울리고 있었다. 괘종시계는 4시 14분을 가리켰다. 현관에서 피곤하지만 발랄한 목소리가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