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도 야근이 복사가 된다고 젠장~!] 너의 꿈속에

2022. 11. 25. 22:52

온종일 울려 퍼지는 낡은 캐럴 소리. 동일한 메들리 반복해 거리 메운 지도 어언 한 달이다. 릴은 늘어난 니트 소매를 습관적으로 당기다가, 문득 뿌연 창을 문질러 닦는다. 그 자리만 성에 걷혀 선명한 상을 갖는다. 거리엔 노랗게 영롱한 불빛 가득하다. 그 아래 거니는 사람들은 온통 사랑과 축복으로 연결되어 행복에 겨운 행색을 한다. 그저 순수하게 ‘지겹지도 않은가’, 의문하나, 좋은 날이니 구태여 말 얹고 싶지 않단 감상이 앞서 입을 다문다. 비록 그가 후배 하나 데리고 나와 야근하는 동료들에게 먹일 피자 몇 판 구매하기 위해 이 작은 가게에 몸 구기고 있는 형편이더라도. 그 흔한 케이크와,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말 하나 없으나 마음 특이하게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페퍼로니 말고 비싼 거 먹을까?” 동의를 구하며.

그럼 디셈버가 좁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익숙한 낯을 한다. 피곤함에 현실과 미묘하게 유리되어 사고 느리게 직조되고, 조금은 질린 듯, 또 체념한 듯. ‘굳이요?’ 물음은 내어진 말 없이도 건재하고, 릴은 어깨를 으쓱인다. 함의 명백하고, 디셈버 콜린스는 제 선배 이겨 먹은 적이 없다. 빨간색 초록색 교차한 타일 바닥 세며 뜻 꺾길 기다려보아야 시간 낭비라는 뜻이다. 결국 그는 나직한 한숨 끝으로 “그러세요, 그럼.” 어떤 거 드시고 싶은진 알아서 고르시고요…. 수긍하며 허리 수그린다. 기어이 볼 닿은 테이블이 차다.

얼어붙은 듯 둘러싼 모든 환경 느리게 흐르는 감각. 새 손님이 문 열어 달린 종 딸랑거리는 소리, 잠시간의 외풍에 다 낡아 한쪽 테이프 떨어진 포스터 속 우스꽝스러운 마스코트의 얼굴이 구겨지고, 익숙한 음성. 「2개는 페퍼로니 대신에, 갈릭 페퍼 스테이크로 변경해주세요….」 카드를 넣고, 인식하는 기계음. 가게 안을 가득 메운 인위적이고 건조한 훈기. 눅진한 치즈 향 인지할 즈음엔 시야 가물거린다. 릴은 영 맥 추지 못하는 후배 들여다보다, “콜라 하나만 주세요.” 손에 들어간 캔을 그대로 뒷덜미에 가져다 댄다. 목적의 달성은 쉽다. 흔한 불평조차 없이 진저리치며 몸 일으킨 디셈버가 기어이 이골을 내고, 그는 웃는다. “가는 길에 커피 사줄게.” 그래야겠다.

타이밍 좋게 커다란 피자 몇 판이 그들 앞에 놓이고, 양손 가득히 든다. “같이 일했는데 왜 선배만 괜찮은 거예요?” “난 원래 잘 못 자잖아. 뭐 그런 걸 부러워해.” 시답잖은 대화. 빈손 없어 어깨로 유리문 밀어내면 차고 건조한 공기가 폐부에 훅 끼쳐 단숨의 고통 남긴다. 애매하게 떠돌던 네온과 캐럴 가사가 선명해진다. 같은 장소에 공존하고도 동떨어진 것만 같다. 릴은 그에 대해 동의를 구하려다, 제가 놓친 건지 상대가 놓친 건지 동행인이 곁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깨닫는다. 고개를 돌려보면 그는 길거리 가판대에 시선 주고 있다. 선뜻 뒷걸음질 쳐 바라보면 낡은 오르골 박스 몇 개 놓여있고, 그즈음 피자 봉투를 팔에 끼워 넣은 채 디셈버 콜린스가 하나를 고른다. 의외라는 감상을 뒤로, “사줄까?” 크리스마스잖아. 물으면 대꾸는 불퉁하다. 됐어요, 그냥 제가 살게요…. 돌아갈 곳은 집 아닌 회사다. 지루하게도.


*


사위 어두워진 것은 11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다수가 팔 휘적여 짐을 챙기고, 몇은 적당히 늘어진 채. 실상 전원이 그런 식으로 보내야 할 시간에…. 릴은 좌절했다. “…까먹고 있었어.” 저장 안 해뒀는데. 옆자리에 앉은 디셈버 콜린스가 가방 챙기다 말고 붙들린 것은 당연한 수순 되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 대신 조금만 쉬다 해요. 간곡한 요청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고, 때마침 새까만 하늘에 불꽃 오르리라 안내 울렸다. 오직 그것만을 위한 전력 차단. 이 도시는 그렇게 굴러가곤 했다. 다 식은 피자가 단조롭게 잘려 입 속을 구르듯이, 여지없이. 릴은 그 사실을 곱씹고, 짓씹다가, 지겹도록 들은 캐럴의 첫 소절 반복될 즈음 문득 입을 연다. “있잖아, 나 연초엔 떠나려고.” 불친절한 통보는 최소한의 배려와 결을 함께 한다. 큰 흠결 되지 못할 것을 의심치 않기에 가다듬지 않았다.

때문에 사뭇 가라앉은 공기, 서리 같은 적막은 그가 예상한 반응과는 큰 거리가 있다. 침묵으로 말미암은 정적 속 불꽃 터지는 소리만이 비명처럼 울린다. 여운이 길다…. 빈 대기에 조급하게 음성 욱여넣어진다. 갑작스러울 수 있단 거 알아. 사직서 낸 지도 얼마 안 됐고, 지금이라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너도 알잖아, 내가 늘, 떠나고 싶어 했단 거…. 이번의 것은 변명과 비슷한 형태다. 다만 응답은 없고, 유리에 짓뭉개져 어룽거리는 색색의 빛이 흑백의 안구에 한참을 맺힌다. 사무실 의자 바퀴가 길게 구른다. 등받이에 한껏 무게 실은 채, 낯 반쪽을 어둠에 파묻고 그가 묻는다. “조금 더 계시는 건 안 되겠어요?” 물음은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답 된다. 모래 삼킨 듯 입 안이 꺼끌거리고, “…왜?” 가까스로 내어진 단일의 어절. 이상한 소릴 듣기라도 한 것처럼 디셈버가 웃는다.

“이유를 물으실 줄은 몰랐는데.” 시야며 청야가 어지럽다. 들어야 할 음성이 명확함에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때마침 말은, 「선배는 모르시겠지만.」 사실을 짚는다. 방금 듣고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 다시 한번 말해줄래?” 재청하면, 심중 알아차린 듯 돌아오는 호흡은 영 마뜩잖은 기색 담는다. 시선이 낯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찰나 북받치는 듯 하던 감정 죄 거세한 듯, 디셈버가 말없이 피자를 마저 입에 밀어 넣는다. 딱딱한 빵 부분만 일회용 접시 위에 남고 나면 불꽃은 죄 화려함을 잃는다. 자리 지킬 인내 역시 다 닳아 흔적뿐이니, “미안, 먼저 가볼게.” 릴은 팔 뻗어 더듬은 자리에서 제 겉옷 황급히 두른다. 꿰어 입을 시간도 없이 발 떨어진다. 길 재촉할 수 없는 밤. 온통 어둡다. 자정 알리는 알림도, 목소리조차. “성탄의 축복은 다 끝났네요.” 낡은 캐럴, 오르골로 짜인. “괜찮아요. 몇 번이고 거절하셨거든요.” 괜찮아요. 어차피……. 눈을 감는다. 조각 기워 맞춘 적막은 산만하기만 하고, 발소리는 기이한 대꾸에 멎은 채다. 아직 도시의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의 인사란 단 하나 적절함을 그는 알고 있다. 예수 우리 구하시고 모든 죄업 사하시니, 내일 밝아와 더 늦기 전에… 구하시려거든 구하소서. 그럴 수 있다면.


*


하나, 눈을 뜬다. 악몽을 꾼 듯도 하나 흐릿하기만 하다. 빵에 덜 녹은 버터 발라 입에 문다. 둘, 페퍼민트 맛 치약으로 양치, 얼마 전 특가로 구매한 클렌징폼 터 세수한다. 셋, 두꺼운 옷을 챙겨입고 나선 목도리를 묶어 여미고, ‘에리히 베링’의 이름이 쓰인 신분증을 건다. 대기는 건조하고도 차다. 공중에 번지는 흰 숨에 넋 놓을 새 없이 인파의 일부가 된다. 넷, 출근. 사무실은 성탄에도 여전히 삭막하다. 연말엔 업무가 밀린다. 다섯, 점심으론 샌드위치. 식후 담배 타임에는 참여해본 적 없다. 여섯, 팀장이 추가업무를 배분한다. 「꼼짝없이 야근이네.」 누군가 말한다. 일곱, 「저녁으론 뭐 사 올까요.」「피자 어때.」 자리에서 일어나 심부름 자처한다. 디셈버 콜린스가 마지못해 동행한다. 여덟, 「…페퍼로니 말고 비싼 거 먹을까?」 한숨. 아홉, 양손 가득 피자 들고선 가게 나선다. 커피 시키고서 들 손이 없다. 열, 정전을 잊고, 열하나. 이제야. 캐롤과 불꽃놀이.

에리히 베링은, 그러니까, 릴은 하늘에 올라 터지는 불꽃 바라보며 꼭 정해진 수순처럼, 조형된 대사를 뱉듯 발음한다. “있잖아, 나 연초엔 떠나려고.” 디셈버 콜린스는 답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알 수 없는 불안. 릴은 문득 그가 입 여는 순간을 알 것만 같은 착각─ 아니, 기시감에 휩싸이고, 인지는 곧 벼락같은 꺠달음 된다. 비명처럼 여운 남기는 불꽃, 흑백의 안구에 맺혀 부서지는 빛. 같지 않은 것은 한 인물의 심상뿐.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묵묵히 바라보던 디셈버 콜린스가 입 연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봤거든요.” 아주 오래. 그것이 모종의 신호탄 되어 경악은 곧 질린 기색을 담고, “너…, 뭐야?” 어긋난다. 문답 맞물리지 않는다. 좀 전의 통보가 그러했듯 모든 언어가 상냥함을 잃고 외부로 내던져진다. “처음에 들었을 땐 많이 놀랐어요.” 때문에 비수가 되어,

그는 단조로이 전한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늘 선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단출하고 갑작스럽더군요. 할 수 있는 호소와 사정은 모두 해본 것 같아요. 제가 간과한 점은 당신이 박정하진 않지만 무정한 사람이란 점이었고, 결국엔 또 기대하고 있었단 점이죠… 당신이 조금은 제 마음 알아주리라고. “익숙한 몰이해의 온상이죠.” 처음엔 기회라고 생각했고, 한계 수용하고 나서는 이유를 의문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따윈 없었고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사정한다는 게 얼마나 비루한 일인지 새삼 복기했으며, 가는 사람 붙잡아 당길 적의 균형은 관계가 그러하듯 쉬이 기운다는 걸 뼈저리게 알았다. 깨지지 않는 스노우볼, 산산이 흩어진 마음과… 부딪혀 망가진 사람. 어느 때 발 헛디뎌 넘어진 곳에 모서리가 있었고 그렇게 누군가 미동 않았다. 건조한 모노톤 바닥 위로 피가 번지는데 도무지 무슨 색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알록달록 터지는 불꽃이 너무 환해서, 자신만이 초라해서. 그래서……. 비로소 결론이다. 당신이 내 심정 조금만 이해했으면 좋겠어.

좇을 적의 초조함, 놓칠 적의 박탈감, 쥘 수 없음을 받아들인 후의 허무함. 일련의 과정이 사람을 스쳐 지나간 후에는 회한뿐이다. 디셈버 콜린스는 자신의 머물 수 없는 곁과 릴의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비슷한 감각 가지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당신은 오늘의 크리스마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죄 토로하여 퇴로 닫는다, 낡은 캐럴 소리가 들린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난 네게 내 마음을 주었어. 하지만 넌 그다음 날 그것을 버려버렸지.」 하지만 오르골 태엽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당신은 이제 그럴 수 없다. 금속과 금속이 맞닿아 차고 맑은 소리를 낸다. 디셈버 콜린스는 울 듯이 웃는다. 이때의 인사란 단 하나 적절함을 그는 알고 있다. 구하시려거든 구하소서. 사하려거든 사하시고. 그따위 것은 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신앙과 불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에 통용되는 까닭은 종교도 인사도 사람을 묶기 위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저주 아닌 축복이다. 애타는 진심 담긴.

─ 메리 크리스마스, 선배.


*


날은 한철이었고 유난히 여운이 길었다. 눈은커녕 구름 한점 없이 드높은 하늘을 건조하게 벼러진 대기가 빼곡이 채웠다. 폐부 긁는 호흡이 반갑지 않아서, 릴은 늘어난 니트 소매를 습관적으로 당기다가 문득 입을 연다. “너, 나한테 크리스마스 인사 했던가.” 맥락 없는 물음에 디셈버가 와락 낯을 구긴다. “그런 건 왜요?” 시선이 허공 맴돌다 마주치고, 맥없이 흔들린다. 추락한다. 구르다 불어난 눈덩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니, 그냥. 들은 것도 같아서.” 숨이 막혀서…….